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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백수의 900원으로 시직한 세계일주!

원래 미친놈이 아니라, 여행에 미친거다.
2달만에 1500만원을 탕진하고, 900원으로 시작한 나의 세계여행 이야기[여행494일째]
100번 울었고, 1000번 웃었으며, 10,000번 감동했다.





<나는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여행자다. >

나는 존나 거지다. 진짜 돈도 없을 뿐더러. 사실 빚이 1000만원이 넘는다. 학자금과 친구에게 빌린 돈을 합치면 그렇다. 하지만, 취업을 했다면, 오라는 곳에 갔다면, 어쩌면 몇 달이면 갚을 돈이라 신경쓰지 않는다. 다만 지금 돈이 조금 없을 뿐이다. 교통비 숙박비가 거의 안든다. 밥도 얻어 먹는다.   
이제 여행한지 500일 남짓, 하지만 나는 가야할 길이 멀다. 잠정적으로 내년 연말까지는 여행을 할 생각이고, 미 대륙도 아시아도 가고 싶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다. 하고싶은 것도 많다. 하지만 돈은 없다. 없어도 된다. 어떻게든 결국엔 해결된다. 의지만 있으면 말이다. 결국, 나는 내년에 '오바마 대통령'과 '워렌버핏'을 만나고 말 것이다.  남미에서는 세상을 바꿀 프로젝트를 실현시킬 것이다.

내가 빚을 내서라도 한국을 떠나고자 했던 이유는 세가지다.
세상에 대한 분노 그리고 사람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나에 대한 분노.

첫번째로
세상에 대한 분노. 우리집은 못 살았다. 뭐 다들 그렇다 시피 농사짓는 집이 그랬다. 문제는 비교당하고 비교되는 것이었다. 가끔은 비오는날 지나가다가 아버지가 트럭타고 학교에 오셨는데, 농기구와 거름을 싣고 오신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자가용이거나 외제차 였는데, 부끄러웠다. 어릴적엔 그런 아버지가 무능력해 보였고 숨기고 싶었다. 사실 아버지는 초졸에, 어머니는 학교에도 안가 보셨다. 그땐 그랬다 한다.(할아버지 할머니이다) 부끄러웠다. 세상이 조금 잘 못 되어보였다. 왠지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밤낮으로 논밭에 나가서 일하는데, 태풍 한번이면 빚이 수 천이 다시 늘어나는 세상이 미웠다. 

두번째로,
사람에 대한 분노였다. 말로 하긴 그렇지만 내게도 지난 사랑이 있었고,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들이 동시에 사라졌고. 그 이후에 법적 가족의 오랜 배신이있었다. 그 이후로 사람이 싫어졌다. 힘든 시가가 있음과 동시에 더 좋은 사람들이 내게 와주었지만, 깨져버린 그릇에 물은 이미 오랬동안 새고 있었다. 전문의는 트라우마라 했다.

세번째로,
나에 대한 분노다. 나는 왜 이런것 조차 모르고 있고, 나는 왜 그런것들을 관리할 만한 능력이 없었으며, 그런것을 마음에 그냥 아무렇지 않게 담아둘 수 있는 그릇의 사람이 아닌가? 라는 분노였다. 내가 너무 무능해 보였다. 그래서 몇몇 합격 기업의 취업을 포기하고 떠났다. (떨어진 곳도 많다.)

전역 직전에 상담을 받았다. 트라우마라고 말하기 싫지만, 그것에 가깝다고 했다. 신드롬에 가깝다고 했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 것이라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당시 중대장님께 편지로 내 상황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왔을 때 나는 잠을 잘 수 없었고, 도망치고 싶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는 돈에 대한 욕망으로 바뀌었고, 그 사람들에 대한 분노는 나를 대기업 입사라는 타이틀에 목메게 했다. 

그렇게 장교로 전역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할 때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했는지 모른채, 연봉만을 보고 지원했고, 일정 연봉이 되지 않는 기업은 합격해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면접을 보고, 자소서를 적으면서 생각했다. '28, 이거 뭔 지랄이지?' 취업관련책 20여권을 사서 읽고 준비하고, 자격증 8개, 영어성적을 준비하면서 생각했다. 여기 들어가면 '그들이' 조금은 부러워하겠지? 내가 잘난 꼴을 보면 배아파 하겠지? 거기에 취해있었다. 

그렇게 나는 불면증을 이용해 취준에 몰두했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때 잠이 오지 않았다. 중요한 시험들을 앞두고 잠이 오지 않았다. '배아파라 제발 배아파 달라'고 외치는 내가 너무 한심했고 동시에 내가 너무 못나 보였다. 

그렇게 나는 역설적으로 사람이 그리웠다. 좀 믿고 싶더라. 다시,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냥 도망 쳤다. 가장 빠르게 도망 칠수 있는 아일랜드로 갔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익명'을 즐겼다. 사실 나가서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사람이라는걸 다시 만나고 싶더라. 

아일랜드에서 방황

퇴직금, 빌린돈, 마지막 월급, 보험해약금을 다 합친 1900만원에서 학원비 400을 뺀 1500을 가지고, 제대로 놀았다. 처음에 나는 아일랜드에서 구글에 취업할 줄 알았다. 그리고 한국을 과거를 잊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클럽과 펍의 연속. 살짝 방탕 방황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2달 반만에 통장 3개의 합산 잔고가 900원이 남았다. 주머니를 뒤져서 나온 동전으로 1주일을 버텼다.

 길거리 신문팔이가 되었다.

신문팔이를 시작했다.  2달을 했다. 우범지역에서 신문을 팔아서 약쟁이들과 중간에 신문 훔쳐가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그리고 한달 뒤에 레스토랑 청소잡과 스시주방잡을 구했다. 어쩌다보니 쓰리잡을 하게 되었다. 6시부터 오후 2시 까지 주방일,  2시 반부터 다섯시까지 신문팔이,  저녁 8시 반부터 10시까지 청소일. 솔직히 힘들었다. 그때 정장 입고 입사 연수간 동기들 사진이 보였다. 꽤 많이 쓸쓸했다. 외로웠지만 한국에 전화할 수는 없었다. 다시 괴로웠던 생각이 났다.

노숙자를 만났다. 그리고 노숙자가 되었다.

 그런 일상 속에서 집가는 길에 노숙자를 보았다. 비를 맞고 외로이 고개떨군 모습이 나와 비슷해서 나의 이야기를 하게되었다. 나도 울고, 그도 울었다. 우린 친구가 되었고 나는 노숙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여행에 대한 목표가 생겼다. '사람' 그래서 12월에 소셜펀딩을 했다. 400만원 넘게 후원을 받았다. 
 10월부터 8개월 동안 노숙자 100명 넘게 만났다. 인터뷰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먹고 했다. 그래도 이해 할 수 없어서 노숙자가 되기로 했다. 너무 외로웠다. 지독히 외로웠다. 나는 그들을 원하는데 그들은 나를 원하지 않는 경험을 수 만번하게 되니 작아졌다. 그중에 다른 노숙자가 나를 도와주었다. 또 울었다.

250만원으로 7개월 유럽여행

남미행 비행기 값을 50만원을 빼면, 200만원으로 7개월을 살았다. 5000km 히치하이킹과 노숙 그리고 친구 찬스, 길에서 친구만들기, 카우치 서핑, 민박스텝 등 일을 하면서 비용을 절약했다. 사실 무전여행도 가능하다. 수 많은 노숙과 캠핑, 나무를 하거나 물을 길러주는 등 잡일을 하면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고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날 가능성이 너무 크다. 그래서 최소한의 비용이 필요하다.

나는 여행하면서, 100명이 넘는 노숙자들과 만났고, 인터뷰도 했다. 그리고 노숙자가 되기도 했으며, 매춘부들과 마약상을 만났다. 또한, 자주 혹은 가끔씩 나체주의자 동성애자들과 위험한? 동거를 하기도 했으며, 아이거 노스페이스 절벽에서 조난을 당하기도 했다. 의사, 변호사, 외교관, 요리사, CEO, 노숙자, 매춘부, 마약상 등등 셀 수 없는 사람들의 웃음 소리와 삶의 이야기를 들었고, 눈물도 보았다. 

카미노 900km를 걷기도 했으며, 미친듯이 춤추고 술먹고 놀기도 했고, 친구들 보다 노숙자나 집시들과 더 친하게 지냈다. 가끔은 집밖에 나가지 않고 잉여처럼 1주일을 지내기도 했다. 이런 것을 해라고 하는 '가이드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최고의 가이드 북은 '내 심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여행하는 동안은 내 심장의 충동을 따르고 싶다. 



<도와주신 분들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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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 호스트들 그리고 거리의 운전자들, 페이스북 친구들, 네이버 블로그 이웃님들,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 그리고 '나는 노숙자다'다큐 공유해주신 분들, 그리고 나에게 다시 사람을 찾게 해준 Mr. Tomy. 지금 공유, 좋아요 해주실 분들. 그리고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모두 너무 감사합니다.  모두에게 내년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인사 드리겠습니다.  아직 잊지 않았고, 계속 잊지 않겠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계속 응원 해주십시오. 


<무전여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말한다. '대단한' 무전 여행을 한다고, 사실 무전여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돈이 안들었을 뿐이지, 타인의 돈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 그게 갚아야 할 빚이다. 나 역시도 백명이 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사람을 찾아가고 있음에 행복하다. 많은 철학적 깨달음도 얻는다. 꿈에 대해서 자아에 대해서, 기호와 적성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기존의 책들에 말들에 세뇌에 가깝게 들었던 말들 말고 내 철학이 생긴다.
나는 받은게 많다. 이걸 갚고 싶다. 돈을 갚기 위해선 아직 아니다. 조금 다르게 갚고 싶다. 노숙자 아저씨에게도 다른 여행자에게도. 그걸 연구 중 이고 계획 중이다. 사실 많은 응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상에 보여주고 싶기도 하다. 여행에 돈이 필요한건 아니라고. 호의를 받지 않는 사회에서 호의를 받고, 다시 돌려 줄 준비만 하면 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아직은 응원이 필요한 ㅈ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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